당당한 기와집, 옹기종기 둘러앉은 다정한 초가집, 넓고 호젓한 골목길….
조선조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과 징비록(국보 132호)을 집필한 서애 류성룡 형제로 대표되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 가장 한국적인 곳이어서 멀리 영국 여왕이 들르기도 하고(1999년),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 등 소중한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한 가치가 널리 인정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2010년) 하회마을! 그러나 풍산류씨 세거 600년 역사를 간직한 채 흐르는 낙동강 정경을 대표하는 하회구곡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병산, 남포, 수림, 겸암정, 만송, 옥연, 도포, 화천, 병암 등 절경 아홉 곳을 이르는 하회구곡은 류운룡(1539~1601)의 후손, 남옹 류건춘(1739~1807)에 의한 것이다.
조선조에 성행했던 구곡문화는 남송 때 성리학의 대가 주희의 무이구곡에서 유래한 것, 구곡은 탐욕을 버리고 도(道)를 찾는 아홉 물굽이의 대명사이다.
퇴계의 도산 구곡가, 이이의 고산구곡가 그러한 것처럼 류건춘 또한 ‘무이구곡가’를 본받아 하회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그것은 심심 파적의 음풍농월이 아니라 성리학이 궁구하는 진리를 체현(體現)하려는 삶의 자세였다. 200여 년 전 그날,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의 물빛은 어떠했을까? 초야의 한 선비가 시로 읊은 하회구곡을 거닐어본다.
“낙동강의 근원 있는 물 동쪽에서 흘러내리고/ 병풍바위의 우뚝한 절벽이 그것을 에워쌌네/ 구름 낀 병산에 서원 서니 강이 섬처럼 둘러/ 일곡이라 이름난 터에 버드나무 나부끼누나”(1곡: 병산)
물과 땅이 얼싸안고 누워 있는 태극형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삶의 터를 옮겨온 곳, 강변 모래사장은 가뭄을 막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태극의 형상은 홍수의 범람을 피하기에 족했다.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을 이룬 산 아래 정경은 태극지형과 연화부수형의 형세. 길지(吉地) 중의 길지가 아니었던가.
“5리의 긴 시내 포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운무가 반쯤 걷혀 삼필봉이 드러나 보이네/ 중류에는 나무꾼 피리소리 홍교(虹橋)에 이어지는데/ 이곡이라 두견화가 푸른 남기(嵐氣) 속에 빼어나구나”(2곡: 남포)
“노을 속 오리 나는 빛이 물 서쪽에 비단 같은데/ 갈고리처럼 연결된 돌 잔도는 하늘 오르는 사다리에 닿았구나/ 세찬 물결 속의 지주(砥柱) 바위 높다랗게 서 있는데/ 삼곡이라 흰 모래밭에 기러기 떼 내려앉는구나”(3곡: 수림)
“굽어보니 푸른 물결 부딪혀 역류하며 흘러가는데/ 하늘거리는 바위틈 대나무들 정자 옆에 서 있네/ 낚시 바위는 보였다 말았다 여울 소리는 오열하네/ 사곡이라 선조의 정자 십경에 들기에 손색이 없도다”(4곡: 겸암정)
“강의 반은 솔 그늘이 드리워 묶인 배를 덮고/ 삼동에는 눈이 덮이며 봄에는 봄기운을 띠네/ 꾀꼬리와 학의 울음소리 바람결에 뒤섞이는데/ 오곡이라 서리 맞은 단풍 적벽 앞에 붉구나”(5곡: 만송)
“백 길의 부용대가 옥처럼 맑은 물에 비치고/ 푸른 절벽 끊어진 곳에 물소리가 요란하네/ 나루 입구에서 맞이하고 돌아갈 때 전송하니/ 육곡이라 능파대에서 뱃노래가 들리는구나”(6곡: 옥연)
책의 이름에 그 뜻이 들어 있듯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역사적 소임의 산물이었다.
옥연정사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이 없었다면 선생이 피로 기록한 16권 7책의 국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옥연에 맑게 씻은 붓을 들어 유비무환의 소중함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강 모서리의 한 조각 외로운 섬 푸르고/ 지나가는 나그네 그림자 백사장에 길구나/ 깊은 가을 누런 숲은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칠곡이라 농부들 노랫소리 원근에 들리네”(7곡:도포)
“서원을 품은 맑은 시내 백사장을 빙 둘렀는데/ 산의 이름은 화산이고 아래 시내는 화천이라네/ 명륜당 높은 곳에 청금(靑襟)의 선비들 모여 있으니/ 팔곡이라 글을 읽는 소리 북쪽 물가까지 들리네”(8곡: 화천)
“사방으로 돌던 물결 곧장 아래로 내달리고/ 너럭바위 앞의 깎아지른 절벽 병풍 문이 되었네/ 깊은 못의 용이 포효하여 종담(鍾潭) 골짜기 갈랐으니/ 구곡이라 바람 세차고 밝은 태양 어둑어둑하네”(9곡: 병암)
구곡시를 아우르는 총론 성격인 〈합곡시〉에서 류건춘은 “그림 같은 절벽 풍경 읊은 열여섯 편의 시/ 뱀에 사족 더하기 어렵고 물은 헤치기 어렵네/ 못난 나는 만년에 주자의 무이구곡시 좋아하여/ 감히 강가 거처를 작은 무이에다 견주었네”에서와 같이 松林霽雪(만송정 숲에 눈 개인 경치), 赤壁浩歌(부용대 앞 뱃노래 경치), 渡頭橫舟(옥연정 앞강을 건너는 배 구경), 平沙下雁(드넓은 강변에 내려앉는 기러기 구경) 등 하회 16곳의 절경을 노래한 부친의 시를 따를 수 없다며 효를 갖추고, 감히 강가 초라한 거처를 무이에다 견주었다며 한껏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보인다.
‘무이’란 무엇인가? 류건춘이 거닐었던 강가에 서서 밤하늘을 떠올려본다. 강물은 도도하게 한여름 밤을 흘렀으리라. 강물 가득 달걀 불을 밝혔으리라. 만송 백사장엔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으리라. 그런 날이면 청홍색 띠를 두른 초랭이가 보름달 기울도록 어깨춤을 추었으리라.
양반들의 축제와 상민들의 놀이가 어떻게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양반들은 경비를 대고 상민들은 노동으로 답한 문화적 품앗이 덕분이었다. 가재와 용이 한 하늘 아래서 흙탕물을 일으키는 작금의 사정에 견줄 때 신뢰와 공감과 소통의 품앗이 문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반상의 벽이 높았던 당대에 조화로운 공동체의 삶을 살았던 하회마을의 그날은 선비들이 다투어 꿈꾸던 무이의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
“구곡장궁안활연 상마우로견평천 어랑갱멱도원로 제시인감별유천(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에서와 같이 그곳은 별천지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이었으니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