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광덕리 옥연정사 소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안동 광덕리 옥연정사 소나무는 서애 류성룡이 손수 심은 소나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나무를 심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이를테면 선비의 가문을 상징하기 위해 심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다가올 미래의 화평을 기원하며 하늘에 사람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 심은 나무도 있다.

그러나 농경문화 시절, 일상적으로 나무를 심고 키웠기에 그 까닭을 일일이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만큼 누구나 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특별한 까닭이 아니라 해도 나무에 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경우가 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63세 때 나무를 심었고, 그 심은 내력을 시(詩)로 남겼다.

이보다 4년 앞선 59세 때도 “옥연정사에 나아가 보허대(步虛臺)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퇴계는 류성룡이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서애는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임란 때 영의정을 지내면서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나라가 평안할 때의 재상도 쉽지 않건만 서애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시절에 재상을 지냈다.

서애를 조선의 ‘처칠’이라고도 하지만, 서애는 처칠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2차대전 때의 영국보다 임란 때의 조선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파직의 굴곡을 겪고 낙향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그의 불명예와 관직은 회복되었지만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이때가 1604년이었다.

안동 광덕리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임진왜란(1592~1598) 발발 전인 1576년에 터를 잡고 짓기 시작해서 10년 뒤인 1586년에 완공한 류성룡의 서재다.

전쟁이 끝나고 적잖은 상처를 안고 류성룡은 고향에 돌아왔다.

1605년에는 낙동강에 대홍수가 일어나 살림살이를 이어가던 집을 잃게 됐다.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들어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친구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遠樂齋)’라 이름 지은 사랑방에 머무르며 마침내 명저 '징비록'을 마무리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혼을 담고 400년 동안 옥연정사를 지키고 서있는 소나무의 줄기는 강쪽으로 살짝 굽은 채 둘로 갈라지며 하늘로 솟아올라, 8.5m 높이까지 자랐다.

가슴높이 둘레도 2m에 이르는 큰 나무가 됐다.

적당히 비틀리고 굽어지며 자라난 소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마치 자신의 절개를 지키며 굴곡 있는 삶을 살아온 옛사람의 풍모를 고스란히 드러낸 듯한 모습이다.

<안동 광덕리 옥연정사 소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05-04-6
·보호수 지정 일자 2005. 12. 29.
·나무 종류 소나무
·나이 450년
·나무 높이 8.5m
·둘레 1.8m
·소재지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위도 36.543298, 경도 128.518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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